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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의 특질을 드러내는 창으로, 눈과 목소리, 그리고 글씨를 꼽는다. 특히 나에게 있어서 글씨는 일종의 첫인상에 가까운데, 유전자가 그 특징을 좌우하는 눈과 목소리와 달리, 글씨는 온전히 자신을 키워온 당사자의 체온과 성품을 담기 때문이다. 시인 조지훈도 글보다 인격을 잘 반영하는 것이 글씨라고 했고, 사상가 볼테르는 글씨를 목소리의 그림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글씨 못 쓰는 사람과 상종하지 맙시다… 는 훼이크고, 이것은 사람들이 컴퓨터의 키보드와 핸드폰의 문자판에 익숙해진 현대에도 여전히 손글씨가 중요한 이유다. 마치 사람의 얼굴처럼, 글씨는 다양하고 독특한 본질들을 포함하는 까닭에 예쁘다, 멋있다, 단정하다, 활기차다 등의 주관적인 형용사만으로 그 모습과 느낌을 전달하기 힘들다. 종이 위로 남겨진 잉크의 흔적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를 필체로써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 성격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의 얼굴이나 이름은 잘 외우지 못하는 편이지만 각각의 글씨만은 기막히게 기억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내가 반장을 하던 시절, 익명 건의는 아무런 실효성이 없었다. 반장 년이 자꾸 떠든다 고발했던 계집의 이름과 글씨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노라. 몇 글자 안 되는 낙서라도 누구의 솜씨인지 알아볼 수 있고, 감정이 물씬 담긴 편지라면 그 마음까지 읽을 듯 싶었다. 글씨 크기라든지, 펜을 쥐는 법, 세로획을 굴리는 방식, 밑받침 ㄹ의 처리 기법, 둥근 형태의 자음을 시작하고 끝맺는 유형, 글자에서 각 음소가 자치하는 비율, 잉크 혹은 흑연의 농도. 모든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지는 필체는 곧 내가 기억하는 상대의 identity가 된다. 싸이월드 펌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혈액형 이론의 허무맹랑한 방식처럼, 획이 둥근 사람은 주변머리가 좋고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거나, 펜을 꾹꾹 눌러쓰는 사람은 성실하나 고집이 세다, 식의 각인은 아니지만 내겐 글씨가 개인의 인격과 본질을 반영하는 나름의 수단인 것은 확실하다.